유해진 집 앞까지 간 ‘암살자들’ 공세…역사왜곡 주장은 사실이었나 #암살자들 #유해진 #허진호 #역사왜곡논란 #육영수 #한국영화계 #영화
영화를 비판하던 사람들이 배우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 보수 성향 단체 신자유연대와 벨라도는 4일 서울 성북구 배우 유해진의 자택으로 알려진 주택 앞에서 #영화 ‘암살자(들)’ 제작사와 배우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영화 상영 중단과 제작진·배우의 사과를 요구했고, 유해진이 모델로 활동하는 기업을 찾아 광고 계약 철회까지 요구하겠다고 예고했다.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영화의 연출이나 역사 해석을 최종 결정하는 주체도 아닌 배우의 자택과 생업까지 압박할 정도라면, 그 행동의 명분이 된 ‘역사왜곡’ 주장은 실제 작품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영화가 정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로 묘사했는지, 중앙정보부 개입 가능성은 허진호 감독이 새롭게 만들어낸 음모론인지부터 따져봤다.
보수 성향 단체 회원들이 4일 서울 성북구 배우 유해진의 자택으로 알려진 주택 앞에서 영화 ‘암살자(들)’ 제작사와 배우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영화 비판은 왜 배우의 집 앞까지 갔나
이날 집회에는 경찰 비공식 추산 50여명이 참석했다.
신자유연대는 영화 상영 중단과 제작진·배우들의 사과,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했다. 벨라도 측은 유해진에게 이른바 ‘우파 영화’에도 출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상진 신자유연대 대표는 연합뉴스에 유해진이 “정치적으로 균형감 있도록 우파 영화에도 출연해달라”는 취지라고 집회 목적을 설명했다.
영화의 특정 장면을 수정하거나 역사적 근거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넘어 배우가 앞으로 어떤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지까지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유해진이 광고 모델인 버거킹과 키움증권 등 기업도 찾아가 계약 철회를 요구하겠다고 예고했다.
실제로 유해진이 출연한 기업 광고 영상에는 영화와 관련된 항의 댓글이 이어졌고 일부 영상의 댓글 기능이 중단됐다. 키움증권은 유해진 광고 캠페인을 종료했지만 예정된 일정에 따른 것으로 모델 계약은 유지된다고 밝혔다.
논쟁은 이미 작품의 역사 해석을 넘어 배우 개인의 작품 선택과 광고 활동으로 이동했다.
○ ‘박정희가 배후인 영화’라는 주장은 실제 영화와 다르다
현재 공세에서 반복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영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로 암시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정치인들도 이와 유사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실제 영화는 사건의 배후를 특정 인물로 확정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당시 수사 결과의 의문을 추적하면서 다른 공범의 가능성과 중앙정보부 개입 가능성까지 의심한다. 하지만 결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 특정 인물을 사건의 최종 배후라고 확정하지 않는다.
제작진도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허진호 감독은 한 발 더 나아갔다.
허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영화 속 ‘중정 윗선’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분리해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자신까지 위험해지는 사건을 직접 지시한다는 설정이나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는 설정을 애초부터 배제했다는 취지였다.
허 감독이 영화적 가능성으로 상상한 것은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궁지에 몰린 중앙정보부 내부에서 독자적인 움직임이 있었을 가능성 등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영화의 역사적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암살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육영수 여사 사망의 배후로 확정한 영화라는 규정은 실제 영화 내용과 감독의 설명에 비춰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 중앙정보부 개입 의혹은 허진호 감독이 처음 만든 것도 아니었다
두 번째 확인할 것은 영화가 근거 없는 의혹을 새롭게 만들어냈느냐는 문제다.
관련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역시 단순하지 않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2005년 3월 ‘육영수와 문세광’을 2부작으로 방송했다.
제작진은 사건 당시 영상을 다시 분석해 총성의 순서와 탄환 문제를 추적했고, 당시 중앙정보부가 사건 당일 문세광을 알고 있었는지, 문세광의 일본 내 행적과 배후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도 취재했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조준묵 PD는 현장에서 누가 총을 쐈느냐를 넘어 사건의 배후가 누구였는지를 핵심 질문으로 제기했다.
당시 탐사보도는 지금의 영화보다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의 자작극 가능성까지 검토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도 같은 해 사건을 연속으로 다뤘다.
공개된 당시 수사기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를 확인한 제작진은 육영수 여사에게 맞은 탄환이 회수됐지만 그 탄환이 문세광의 권총에서 발사됐는지 감정 의뢰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사건 발생 사흘 뒤 발견된 또 다른 탄환은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닌 것으로 감정됐지만 이후 수사기록에서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런 의문이 중앙정보부 개입이나 다른 배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암살자(들)’이 아무런 선행 자료도 없이 새로운 음모론을 만들어냈다는 설명 역시 사실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 당시 정부의 공식 발표도 검증의 종착점은 아니다
이번 논쟁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1974년 당시 정부가 발표한 수사 결과를 곧바로 객관적 사실의 최종판으로 놓고 영화와 비교하는 방식이다.
당시 수사 결과는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그러나 그 기록을 생산한 수사기관과 중앙정보부, 대통령 경호조직 역시 사건의 중요한 당사자였다.
따라서 공식 기록도 검증 대상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다.
최근 알려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미공개 회고록 내용도 이런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김 전 실장은 일본 수사관의 한국 방문과 공동조사를 자신이 반대했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측 수사관이 문세광을 직접 만나면 진술이 달라질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내용이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총기를 확보했고 재일교포라는 신분 때문에 일본 수사당국이 사건 전 단계의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독립적인 공동 검증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는지 역시 역사적 질문으로 남는다.
공식 발표와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의문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식 발표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질문 자체를 ‘역사왜곡’이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충분한 검증이라고 보기 어렵다.
○ 영화계는 이미 “배우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유해진이 혼자 이 논란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계는 논란이 배우와 스태프 개인에게 향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잇따라 공식 입장을 내고 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1일 영화와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과정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작품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작사와 감독·배우·스태프 개인에게 과도한 비난이 이어지는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핵심은 작품의 표현에 대한 평가와 참여한 개인에 대한 공격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도 논쟁이 작품 비판을 넘어 제작사와 감독, 배우와 스태프 등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위협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개인 비방과 협박, 사생활 거론, 신변 안전과 생업을 위협하는 행동을 멈춰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도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다른 시각은 영화에 필요한 대화의 일부지만, 그것이 창작자와 배우 개인을 향한다면 앞으로 창작자들이 새로운 이야기에 도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유해진 자택 앞 집회가 실제로 열린 4일 한국영화감독조합도 공개적으로 나섰다.
감독조합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영화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신에 대한 선을 넘은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영화 내용과 창작자의 선택을 따지는 데서 벗어나 참여자의 일상과 생업을 동시에 겨냥하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작자와 프로듀서, 촬영감독, 감독들이 잇따라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유해진 자택 앞 집회는 더 이상 한 배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영화계는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실제 창작자의 생활과 다음 작품 선택까지 압박하는 문제로 번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 작품을 비판하는 것과 배우에게 정치적 균형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비판할 수 있다.
유족이 작품 때문에 명예가 훼손됐거나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이용한 영화라면 제작진에게 일반적인 허구 작품보다 높은 설명 책임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유해진은 영화의 역사적 결론을 결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허구의 형사 박철구를 연기한 배우다.
배우가 작품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고 특정 정치적 성격의 영화에도 출연하라고 요구하며 광고주에게 계약 철회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영화의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토론과는 성격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압박의 명분 가운데 하나인 ‘박정희 배후설 영화’라는 규정 자체가 실제 영화가 특정 배후를 확정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충돌한다.
이 지점에서 현재의 ‘암살자(들)’ 논쟁은 단순한 영화 논란을 넘어선다.
○ ‘역사왜곡’이라는 말은 어떻게 배우의 집 앞까지 도착했나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얼마나 정확히 재현했느냐만이 아니다.
누가 어떤 장면을 근거로 이 영화를 ‘역사왜곡’이라고 규정했는지, 그 규정이 ‘박정희 배후설 영화’라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어떻게 확대됐는지, 그리고 그 프레임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감독과 제작사를 넘어 배우·광고주·지방자치단체·해외영화제에 대한 압박으로 확장됐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질문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해진 자택 앞 집회 소식이 알려지자 다모앙·인벤·보배드림 등에서는 영화의 내용보다 “왜 배우 집까지 찾아가느냐”, “배우가 왜 작품의 역사관까지 책임져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 반응을 전체 여론으로 확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 내부의 역사 해석에서 출발했던 논쟁에 ‘배우 개인을 어디까지 정치적 책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판단축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영화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와 그 의문에 반론을 제기할 자유는 모두 보장돼야 한다.
다만 그 논쟁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계속 검증돼야 한다.
‘암살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건의 배후로 확정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를 둘러싼 의문 역시 영화가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과거의 여러 의혹이 중앙정보부 개입을 사실로 증명한 것도 아니다.
확인된 사실과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 영화적 상상과 정치적 해석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가운데 논쟁은 이미 한 배우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한국 영화계가 잇따라 연대 성명을 내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다음 확인 지점은 ‘역사왜곡’이라는 정치적 규정이 영화 비평의 영역으로 돌아올지, 아니면 배우들의 작품 선택과 생업, 영화 제작과 상영 자체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더 확대될지다.